
뉴욕이 '기회의 도시'가 되기 전, 그 땅은 피와 증오로 먼저 적셔졌습니다. 2002년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갱스 오브 뉴욕」은 그 불편한 사실을 정면으로 들이밉니다.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166분 내내 불편했는데, 그 불편함이 오히려 오래 기억에 남는 이유가 됐습니다.
빌 더 부처라는 캐릭터, 주인공을 삼켜버리다
영화의 서사 구조는 고전적인 복수극의 형태를 따릅니다. 아버지를 잃은 아들이 원수를 찾아 돌아오는 이야기, 이른바 '귀환 서사(Return Narrative)'라고 불리는 틀입니다. 귀환 서사란 주인공이 어떤 상실이나 추방을 겪은 뒤 원래의 공간으로 복귀해 정체성을 되찾거나 복수를 완수하는 서사 구조를 가리킵니다. 서부극에서 누아르 영화까지 수도 없이 반복된 형식이지만, 「갱스 오브 뉴욕」이 그 틀을 비튼 방식은 저로서는 꽤 충격적이었습니다.
암스테르담(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이 빌 더 부처(다니엘 데이 루이스) 밑으로 잠입하면서 생기는 문제는 단순한 '위장 생활의 딜레마'가 아닙니다. 빌이 암스테르담을 거의 후계자처럼 대하면서, 관객도 암스테르담도 이 관계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저는 이 지점이 영화에서 가장 솔직하게 작동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원수를 증오하는 것과 그 원수에게서 '아버지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이 동시에 가능하다는 사실을 영화는 굳이 설명하지 않고 그냥 보여주거든요.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연기는 솔직히 말해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스크린 위에서 완전히 지워버릴 정도였습니다. 이것은 칭찬이자 동시에 영화의 구조적 문제입니다. 주인공이 빌 앞에서 존재감을 잃는다는 건, 영화가 의도했든 아니든 복수극의 중심축이 흔들린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갱스 오브 뉴욕」이 '암스테르담의 성장 이야기'로 완전히 기능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이라는 캐릭터가 단순한 악당으로 소비되지 않는 이유는, 그가 나름의 내러티브 코드(Narrative Code)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러티브 코드란 특정 인물이 어떤 가치와 행동 원칙에 따라 움직이는지를 규정하는 서사 내적 규칙을 의미합니다. 빌은 잔혹하지만 자기 규칙에서 어긋나지 않고, 그 일관성이 오히려 설득력을 만들어냅니다. 이 캐릭터가 왜 오래 기억에 남는지, 영화를 보고 나서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빌 더 부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맥락 몇 가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1840~60년대 뉴욕 파이브 포인츠는 아일랜드계 이민자와 앵글로-프로테스탄트 토착민 사이의 갈등이 폭발하던 공간이었습니다.
- 빌은 그 갈등에서 '토착민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폭력을 정당화하는 인물입니다.
- 그의 배타적 민족주의는 당시 미국 정치 지형에서 실제로 광범위하게 존재했던 이념이었습니다.
화려한 야심, 그리고 메워지지 않는 빈자리
「갱스 오브 뉴욕」을 보고 난 뒤 "이 영화, 뭔가 아쉽다"는 느낌이 남는다면, 그건 단순히 러닝타임이 길어서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른 문제입니다. 영화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담으려다가 정작 핵심 감정선 몇 가지를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채 끝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암스테르담과 제니(캐머런 디아즈)의 관계입니다. 제니는 생존을 위해 강한 쪽에 붙어온 여성으로, 빌의 통제권 아래에 있다가 암스테르담과 감정적으로 연결됩니다. 그런데 이 관계가 서사 전체에서 충분한 무게를 얻지 못합니다. 두 사람의 감정선이 쌓이는 과정보다는 빌-암스테르담-제니 사이의 삼각 갈등 구조가 더 빠르게 작동해버리고, 제니는 결국 서사의 촉매 역할에 머무는 인상을 줍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영화가 역사극으로서의 야심과 인물 드라마로서의 완성도 사이에서 균형을 잃었다고 느꼈습니다.
또 하나 짚고 싶은 건 이민자 서사의 처리 방식입니다. 영화는 아일랜드 이민자 집단에 분명히 공감의 시선을 보내지만, 그들 역시 폭력과 무지에서 자유롭지 않은 존재로 그립니다. 이 균형 잡기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구조적 차별과 정치·경제적 맥락을 더 깊이 파고드는 대신, 영화는 "양쪽 다 폭력적이다"는 선에서 묘하게 멈춰 버립니다. 디에게시스(Diegesis), 즉 영화 내부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의 인과 관계가 역사적 구조보다 인물들의 감정과 충동 위주로 정리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1863년 뉴욕 징병 폭동(New York Draft Riots)은 미국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크고 치명적인 도시 폭동 중 하나였습니다. 사흘에 걸쳐 최소 119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을 입은 이 사건은, 남북전쟁이라는 국가적 폭력이 도시 하층민의 분노와 맞물린 복합적인 사건이었습니다(출처: Smithsonian Magazine). 영화는 이 장면을 암스테르담과 빌의 최후 결전과 겹쳐 놓으면서 극적인 혼돈을 만들어냅니다. 저는 이 장면이 시각적으로는 압도적이었지만, "왜 하필 지금 이 폭동인가"에 대한 역사적 설명이 충분하지 않아 다소 아쉬웠습니다.
19세기 미국의 이민자 문제를 다룬 학술적 연구들은, 당시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이 경험한 구조적 차별이 단순히 갱단 간의 폭력이 아니라 제도적 배제의 결과였음을 일관되게 지적합니다(출처: Library of Congress, Immigration History). 영화가 이 맥락을 조금 더 깊이 파고들었다면, 개인 복수극과 역사 비판이 훨씬 단단하게 맞물렸을 것입니다. 이건 제가 영화를 다시 보면서도 아쉬움으로 남는 부분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완성도 면에서 아쉬움이 있음에도, 미국과 뉴욕의 탄생 신화를 정면으로 부수려 했다는 점에서 여전히 의미 있는 작품입니다. 빌 더 부처라는 괴물 같은 캐릭터와 파이브 포인츠의 날 것 그대로의 풍경은, 보고 나서도 한동안 머릿속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현대 뉴욕의 스카이라인 아래 묻혀버린 무덤들을 떠올리게 하는 엔딩 장면은, 우리가 '도시'라고 부르는 것들이 결국 어떤 폭력 위에 세워지는지를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일깨웁니다. 스코세이지의 야심에 비해 서사가 고르지 않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 불균형조차도 한 번쯤 직접 확인해볼 가치가 있는 영화입니다.
참고: 갱스 오브 뉴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