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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킬러스 (옴니버스 누아르, 심은경, 업자들)

by 영화는 영화다 2026. 4. 17.

영화 더 킬러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극장에 들어갈 때는 "그냥 범죄 누아르 모음집이겠지" 싶었는데, 나오면서는 머릿속에서 네 편의 잔상이 뒤엉켜 한동안 정리가 안 됐습니다. 4명의 감독이 헤밍웨이 단편 「살인자들」을 모티브로 각기 다른 방식으로 풀어낸 옴니버스 누아르 《더 킬러스》, 직접 극장에서 보고 느낀 걸 그대로 써봅니다.

옴니버스 구조가 주는 리듬감, 그리고 피로

제가 직접 극장에서 봤는데, 119분짜리 영화임에도 체감 시간이 꽤 묵직했습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단편 한 편이 끝날 때마다 관객이 감정을 리셋해야 하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옴니버스(omnibus)란 독립된 단편들을 하나의 작품으로 묶어 상영하는 영화 형식입니다. 단순히 에피소드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각 단편이 공통 주제나 모티브 아래 느슨하게 연결되는 방식입니다. 《더 킬러스》는 '킬러', '기다림', '죽음'이라는 공통 주제를 공유하면서도 각 단편의 장르와 연출 문법이 완전히 다릅니다. 김종관 감독의 첫 번째 에피소드 〈변신〉은 심리 누아르에 가깝고, 노덕 감독의 〈업자들〉은 블랙 코미디, 장항준 감독의 〈모두가 그를 기다린다〉는 시대극 스릴러, 이명세 감독의 〈무성영화〉는 형식 실험에 가깝습니다.

이 구조가 주는 즐거움은 분명합니다. 영화제 상영작을 압축해서 체험하는 기분이랄까요. 그런데 반대로, 한 편이 끝나고 다음 편이 시작될 때마다 "지금부터는 다른 규칙입니다"라고 선언하는 느낌이라, 관객이 인물에 충분히 감정 이입할 시간 없이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버리는 아쉬움도 생깁니다. 제 경험상 이 부분이 옴니버스 형식의 가장 큰 구조적 한계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네 편을 하나로 묶는 데 성공한 이유는 심은경이라는 배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네 편 모두에 등장하면서 매번 다른 인물을 연기하는데, 스토리 연결이 없어도 "이 세계 어딘가에 또 다른 심은경이 있겠다"는 상상을 불러일으키며 옴니버스를 하나의 세계관으로 느끼게 만듭니다. 이를 영화 비평 용어로 '뮤즈(muse) 캐릭터'라고 부릅니다. 뮤즈 캐릭터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인물 또는 상징적 존재로, 서사를 직접 이끌지 않아도 관객의 시선과 감정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업자들이 제일 오래 남은 이유

네 편 중 개인적으로 가장 강하게 꽂힌 건 〈업자들〉이었습니다. 보는 내내 웃다가 마지막에 다 같이 조용해지는 그 공기 변화, 극장에서 직접 느껴보니까 이게 단순한 블랙 코미디가 아니라는 걸 알겠더라고요.

이야기의 핵심 구조는 청부살인(請負殺人)의 하청 피라미드입니다. 청부살인이란 금전을 매개로 타인에게 살인을 의뢰하는 범죄 형태로, 영화에서는 이 구조가 한국 사회의 하도급 노동 구조와 겹쳐지면서 풍자가 됩니다. 3억을 받은 3인방이 직접 나서기 무서워 외국인 노동자 카림에게 재하청을 주고, 그 과정에서 액수는 줄고 정보는 왜곡되는 구조가 반복됩니다. 실소가 터지면서도 "이거 그냥 설정이 아닌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습니다.

결말이 특히 냉정합니다. 하청 구조 전체가 수사망에 걸리면서 의뢰인부터 아래쪽 업자들까지 줄줄이 잡혀가는데, 정작 위의 권력 구조는 아무 탈 없이 남습니다. 이 풍자의 날카로움에 대해서는 "결국 '다들 썩었다'는 냉소에 머무르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습니다.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캐릭터들이 구조를 비판하기보다는 그 구조 안에서 소비되는 말초적인 조각들로 기능하고 끝나는 느낌이 있어서, 보고 나서 마음 한가운데를 정면으로 찌르는 통증보다는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관념적인 재미에 그쳤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업자들〉이 참조한 원작 맥락을 이해하면 더 흥미롭습니다. 헤밍웨이의 단편 「살인자들」은 미국 문학사에서 누아르 소설의 원형 중 하나로 꼽히며, 목표물을 기다리며 식당을 장악하는 킬러들의 모습을 건조하게 묘사합니다. 〈업자들〉은 그 '기다림'과 '청부'라는 요소를 한국 현실 속 하도급 구조로 치환한 셈입니다. 이 같은 문학 원작의 현대적 재해석 방식을 두고 한국영화진흥위원회(KOFIC)는 장르 영화의 원전 활용 사례로 주목한 바 있습니다(출처: 한국영화진흥위원회).

이 에피소드를 보면서 구체적으로 눈에 들어온 지점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살인 청부 금액이 하청 단계를 거칠수록 실질 수령액이 줄어드는 구조가 실제 노동 하도급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한다는 점
  • 외국인 노동자 카림이 재하청을 받는 설정이 사회적 약자가 위험을 떠안는 구조와 맞닿아 있다는 점
  • 탐욕을 포기하지 못해 공멸하는 결말이 블랙 코미디 장르의 문법을 충실하게 따르면서도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는 점

무성영화, 형식 실험 앞에서 멈칫했다가

마지막 에피소드 〈무성영화〉는 솔직히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습니다. 제가 직접 봐보니 이명세 감독의 연출이 나머지 세 편과 체질적으로 다르다는 걸 바로 느꼈습니다.

무성영화(silent film)란 대사 없이 배우의 과장된 신체 연기와 자막(intertitle)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초기 영화 형식입니다. 1920년대 이전 영화 산업에서 지배적이었던 방식인데, 이명세 감독은 이 형식을 2024년 누아르 안에 그대로 이식했습니다. 처음엔 "왜 굳이 무성영화 형식이어야 하지?"라는 의문이 컸습니다. 자막과 과장된 제스처 앞에서 이야기를 따라가기보다 형식 자체를 구경하는 상태가 됐거든요.

그런데 어느 지점을 넘어서니까 감상의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이야기를 해석하려는 시도를 내려놓고 화면과 몸짓, 동작의 리듬을 그냥 따라가다 보니, 이야기보다는 감정과 분위기를 체험하는 쪽으로 바뀌었습니다. 나오면서 다른 관객이 "이건 해석하려 하기보다 그냥 받아들이는 게 맞는 것 같다"고 말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제 감상도 정리가 됐습니다.

〈무성영화〉의 배경인 '디아스포라 시티'는 법과 질서가 닿지 않는 지하 도시라는 설정입니다. 디아스포라(diaspora)란 원래 고향을 떠나 타지에 흩어져 사는 공동체를 뜻하는 개념으로, 여기서는 주류 사회 바깥에 존재하는 주변부 집단의 자율적 생존 공간을 상징합니다. 외부에서 킬러가 들이닥쳐 내부 질서를 위협하지만, 술집 사람들이 힘을 합쳐 이들을 밀어내는 구조는 그 공동체의 저항을 은유합니다. 스마일의 죽음이라는 상처를 안은 채로 일상을 이어가는 결말은, 이 공동체가 완전한 승리가 아닌 '상처 입은 생존'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여운이 깊었습니다.

이명세 감독의 연출 방식은 영화 형식 자체를 주제로 삼는 메타 시네마(meta-cinema)에 가깝습니다. 메타 시네마란 영화가 영화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영화라는 매체의 속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관객에게 "지금 당신은 영화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만드는 기법입니다. 이 접근이 모든 관객에게 친절한 방식은 아니지만, 한국 상업 영화 안에서 이 정도 수준의 형식 실험을 시도했다는 점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2024년 한국 극장가는 누아르 장르 영화 편수가 전년 대비 증가 추세를 보였으며, 영화 비평 전문 매체들도 옴니버스 형식의 부활에 주목했습니다(출처: 씨네21).

《더 킬러스》는 완성도와 재미의 편차가 분명한 작품입니다. 하지만 "같은 원작 모티브를 네 명이 이렇게까지 다르게 풀 수 있구나"라는 발견 자체가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길 잘했다는 생각을 들게 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도 네 편의 잔상이 계속 뒤섞이고 순위를 다시 매겨보게 되는 작품이었습니다. 형식과 인용, 오마주에 대한 애정이 풍부한 만큼, 다음 번엔 그 서늘한 형식미가 인물들의 삶과 감정에 한 층 더 깊이 닿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어떨까 싶습니다. 넷플릭스에서도 서비스 중이니, 한 편씩 나눠서 보는 방식도 나쁘지 않습니다. 단, 극장에서 느낀 그 공기 변화는 스트리밍으로는 온전히 전달되기 어렵다는 점도 덧붙여 둡니다.


참고: 더 킬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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