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웨인 존슨이 고릴라와 수화로 대화하는 장면, 처음엔 그게 이 영화의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괴수 세 마리가 시카고를 박살 내는 2018년작 램페이지는 "팝콘 무비의 정석"이라는 평이 지배적이지만, 저는 그 말이 절반만 맞다고 봅니다.
CG 퀄리티와 괴수 액션의 완성도
램페이지를 보고 나서 솔직히 첫 번째로 든 생각은 "이 고릴라, 진짜 아닌가?"였습니다. 알비노 고릴라 조지의 표정 연기와 근육 묘사는 포토리얼리즘(photorealism) 수준이었는데, 포토리얼리즘이란 실제 사진과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 사실적으로 대상을 재현하는 CG 기술을 의미합니다. 2018년 기준으로 봤을 때 이 완성도는 꽤 놀라운 수준이었고, 제가 직접 극장에서 봤을 때 주변에서도 "저거 실제 촬영 아냐?"라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습니다.
괴수 세 마리의 모션 캡처(motion capture) 역시 언급할 만합니다. 모션 캡처란 배우나 동물의 움직임을 센서로 기록해 CG 캐릭터에 그대로 입히는 기술인데, 조지가 동물원 울타리를 부수며 처음 거대화하는 장면에서 이 기술의 효과가 확실히 드러납니다. 야생늑대 랄프가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나는 변이 설정은 게임 원작의 B급 감성을 살린 연출이기도 했고요.
시카고 도심 파괴 시퀀스는 제가 본 2010년대 블록버스터 중에서도 상위권에 들어갈 만했습니다. 건물 외벽이 층층이 붕괴되고 차량들이 괴수의 발에 밟혀 찌그러지는 장면들은 파괴 시뮬레이션(destruction simulation) 기술, 즉 물리 법칙을 컴퓨터로 계산해 실제처럼 보이는 붕괴 장면을 만드는 기술을 활용한 것으로 보이며, 그 디테일이 상당했습니다. 미국영화협회(MPAA) 기준으로 PG-13 등급을 받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파괴 스케일이 성인 관람가 수준으로 느껴질 정도였습니다(출처: MPAA).
램페이지의 CG 강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조지의 포토리얼리즘 수준 표정 연기와 근육 디테일
- 세 괴수 각각의 변이 특성을 살린 모션 캡처 적용
- 시카고 도심 파괴 시퀀스의 파괴 시뮬레이션 완성도
- 알비노 특유의 흰 털 표현과 눈 색깔 디테일
서사 한계와 캐릭터 구조의 문제
일반적으로 게임 원작 영화는 "스토리가 없으니 기대를 낮춰야 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저는 그게 면죄부가 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램페이지 원작 아케이드 게임은 1986년 미드웨이 게임스가 출시한 작품으로, 플레이어가 거대 괴수가 되어 건물을 부수는 단순한 구조였습니다. 그 단순함을 107분짜리 극장 영화로 늘리려다 보니 억지로 끼워 맞춘 서사가 곳곳에서 삐걱댑니다.
제가 가장 납득하기 어려웠던 부분은 악역 클레어 웨이든의 동기입니다. 에너진사 공동대표인 그가 유전자 조작 병원체를 유출해 괴수를 도심으로 유인하는 이유가 "회사 이익"이라고 처리되는데, 시카고 본사 건물이 박살 나면 그게 어떤 이익인지 영화는 끝내 설명하지 않습니다. 내러티브 응집력(narrative coherence), 즉 이야기 내에서 각 사건과 인물의 행동이 논리적으로 연결되는 서사 구조가 이 영화에서는 사실상 포기된 수준입니다.
나오미 해리스가 연기한 케이트 칼드웰 박사 캐릭터도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유형의 영화에서 과학자 캐릭터가 단순히 주인공에게 상황을 설명해주는 역할로만 기능할 때 영화 전체의 긴장감이 떨어지는데, 램페이지가 정확히 그 패턴이었습니다. 반면 제프리 딘 모건이 연기한 러셀 요원은 예상 밖으로 유머와 존재감이 있었는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특유의 느릿한 말투와 배짱이 영화의 템포를 살리는 순간들이 있었거든요.
유전공학적 설정도 과학적 개연성 측면에서 짚어볼 부분이 있습니다. 유전자 편집 기술인 CRISPR(크리스퍼)는 현실에서도 존재하는 기술로, 특정 유전자를 정밀하게 수정할 수 있는 분자 생물학 도구입니다. 여기서 CRISPR란 세균이 바이러스에 대항하기 위해 발전시킨 면역 시스템에서 착안한 유전자 가위 기술을 의미하는데, 실제로 이 기술이 대중에게 알려진 시점과 램페이지 개봉 시기가 맞물리면서 관객들이 "설마 실제로 가능한 건가?" 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영화 속 가스 형태의 유전자 조작 물질은 현실 과학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 설정이 당시 분위기와 맞물려 묘한 설득력을 가졌던 것도 사실입니다(출처: 한국생명공학연구원).
결말에서 조지가 데이비스에게 죽은 척 장난을 치며 끝나는 장면은 이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가장 잘 요약해줍니다. 무거운 여운보다는 "재밌었지?" 하는 가벼운 마무리. 저는 그 선택 자체는 잘못이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그 가벼움을 위해 희생된 서사의 부재가 조금 더 아쉬울 뿐입니다.
램페이지는 기술적 완성도와 서사적 완성도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영화입니다. CG와 액션 시퀀스를 즐기러 가는 관객이라면 기대 이상을 얻을 수 있고, 저도 그 점에서는 충분히 만족했습니다. 다만 "괴수 영화도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는 쪽이라면 비슷한 시기 나온 다른 괴수물들과 비교해 보시길 권합니다. 같은 예산으로 더 단단한 서사를 만든 사례들이 있기 때문에, 기대치를 어디에 두느냐가 이 영화의 점수를 완전히 갈라놓을 것 같습니다.
참고: 램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