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꼬리칸에서 시작한 혁명이 사실 처음부터 윌포드가 설계한 것이었다면, 우리는 그 혁명을 여전히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2013년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그 불편한 질문을 정면으로 던지는 영화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액션보다 답답함이 먼저 밀려왔는데, 보고 나서도 한동안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열차라는 계급구조, 현실과 얼마나 닮아 있을까
설국열차의 세계는 디스토피아(dystopia)를 배경으로 합니다. 여기서 디스토피아란 사회 질서가 극단적으로 억압적이고 불평등한 가상의 미래 사회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유토피아의 반대말입니다. 이 영화에서 그 디스토피아의 무대는 열차 한 대입니다. 기후 조절 물질 CW-7의 부작용으로 지구 전체가 얼어붙고, 살아남은 인류는 오직 이 열차 안에서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열차는 앞칸일수록 상류층, 꼬리칸일수록 빈민이 몰려 있는 구조입니다. 꼬리칸 사람들은 단백질 블록이라는 정체 모를 먹이를 배급받고,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군인들에게 통제당하며 살아갑니다. 반면 앞칸에는 수족관, 레스토랑, 사우나, 학교가 갖춰져 있습니다. 제가 이 장면을 보면서 처음엔 과장된 설정 아닌가 싶었는데, 칸과 칸 사이의 격차가 커질수록 오히려 현실의 어떤 구조가 겹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사회학에서는 이런 구조를 계층 재생산(social reproduction)이라고 부릅니다. 계층 재생산이란 특정 계층의 지위와 자원이 세대를 거쳐 그대로 이어지는 메커니즘을 말하는데, 열차 안에서는 그것이 물리적 공간으로 완전히 고정되어 있습니다. 꼬리칸에서 태어나면 꼬리칸에서 죽는 구조입니다. 영화는 이 닫힌 시스템을 직접 보여줌으로써, 현실 사회에서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계급 고착화를 시각적으로 압축해 냅니다.
관리된 혁명이라는 반전, 무엇이 진짜 변화인가
영화의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커티스가 마침내 윌포드를 대면하는 순간입니다. 지금까지 꼬리칸 사람들의 혁명을 이끌어온 길리엄이 사실 윌포드와 공모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꼬리칸의 반란은 애초부터 열차 안 인구를 줄이기 위해 설계된 조절 장치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반전에서 한동안 멈칫했습니다. 혁명 자체가 지배 구조의 일부였다는 설정이 너무 냉소적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동시에 "우리가 믿는 변화가 사실 누군가 허용한 범위 안의 변화는 아닐까"라는 질문이 따라왔습니다. 사회학자 그람시(Antonio Gramsci)가 말한 헤게모니(hegemony) 개념과도 연결되는 지점입니다. 헤게모니란 지배 계층이 물리적 강제 없이도 피지배 계층의 동의를 얻어 권력을 유지하는 방식을 뜻하는데, 이 영화에서 그것은 혁명마저 흡수해 버리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 장면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커티스가 그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있습니다. 윌포드는 그에게 "네가 후계자가 되어 이 열차를 이어받아라"라고 제안합니다. 체제 안으로 들어와 지배자가 되라는 유혹입니다. 이 순간 커티스는 시스템의 꼭대기를 차지하는 것과 시스템 자체를 끝내는 것, 그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설국열차 결말에서 커티스가 내리는 선택의 핵심은 다음과 같이 정리됩니다.
- 윌포드의 제안 거절: 체제 꼭대기에 앉는 것이 진짜 해방이 아니라는 인식
- 엔진 아래 아이들 발견: 시스템이 유지되기 위해 가장 약한 존재들이 소모된다는 사실 직면
- 체제 파괴 선택: 안을 바꾸는 대신 틀 자체를 무너뜨리는 결정
이 선택은 "지도자만 바뀌는 혁명은 진짜 혁명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행동으로 보여줍니다.
결말 해석, 북극곰이 말하는 것
열차는 크로놀 폭탄으로 탈선해 전복됩니다. 살아남은 사람은 요나와 티미, 단 둘입니다. 그들은 두꺼운 겨울옷을 입고 눈 덮인 설원 위로 걸어 나옵니다. 그리고 멀리 산 쪽에서 북극곰 한 마리가 내려오는 장면으로 영화가 끝납니다.
저는 이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안도와 긴장이 동시에 밀려왔습니다. 단순한 해피엔딩으로 읽히지 않았던 이유는, 모든 것을 잃고서야 겨우 열차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 비극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밖으로 나가는 선택 자체에는 묘한 해방감이 있었습니다.
북극곰의 등장은 생태학적으로도 의미 있는 장치입니다. 극지 생태계에서 북극곰은 먹이 사슬의 최상위 포식자(apex predator)로 분류됩니다. 최상위 포식자가 살아있다는 것은 그 아래 생태계 전반이 어느 정도 기능하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빙하기 이후 지구가 완전히 죽지 않았고, 열차 밖이 즉각적인 죽음의 공간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이 한 장면이 보여줍니다.
살아남은 두 인물도 상징적입니다. 구체제를 지탱하던 어른들은 모두 사라지고, 열차 질서에 깊이 세뇌되지 않은 세대만 남습니다. 기후변화에 관한 연구를 다루는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는 생태계 회복 가능성이 인간 활동의 감소와 직접 연결된다고 분석한 바 있습니다(출처: IPCC). 영화 안에서 열차라는 인류의 마지막 시스템이 멈추었을 때, 역설적으로 바깥 생태계는 살아있었다는 구성은 그 관계를 시각적으로 뒤집어 보여주는 셈입니다.
영화의 한계, 그럼에도 남는 질문
설국열차가 강렬한 문제의식을 던지는 작품임은 분명하지만, 저는 보고 나서 몇 가지 아쉬움이 함께 남았습니다.
가장 걸렸던 건 내러티브(narrative) 구조의 문제입니다. 내러티브란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과 시점의 배치를 뜻하는데,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철저히 커티스 한 사람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계급 구조를 비판하면서도 주인공은 "선택받은 남성 영웅"이고, 꼬리칸에서 함께 싸워온 수많은 인물들의 목소리는 배경 처리됩니다. 타냐가 아들을 되찾으러 싸운 이유, 요나가 열차 밖을 향해 걸어 나가는 감각, 이것들이 더 살아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폭발이 유일한 탈출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영화는 열차 안과 밖을 선과 악처럼 대비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현실에서 불평등한 시스템을 바꾸는 방식이 언제나 그 시스템을 통째로 파괴하는 것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따라옵니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설국열차는 국내에서만 935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 불편한 질문 앞에 앉아 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설국열차가 완벽하지 않지만 여전히 의미 있는 이유는, 편안한 위로 대신 불편한 질문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지금 어느 칸에 타고 있습니까"라는 물음은, 영화가 끝나고도 한동안 머릿속에서 달려갑니다.
설국열차를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액션 영화로 접근하기보다 한 편의 계급 우화로 접근해 보시길 권합니다. 결말이 불편하게 느껴질수록, 영화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참고: 설국열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