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맨틱 코미디인 줄 알고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아노라」가 바로 그런 영화입니다. 제77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제97회 아카데미 작품상을 포함한 5관왕을 차지한 작품이지만, 저는 그 수상 이력보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느낀 그 묘한 불편함이 먼저 떠오릅니다.
신데렐라 서사를 해체하는 방식
영화는 처음부터 관객을 속이는 데 매우 능숙합니다. 브루클린 스트립 클럽에서 일하는 23세 우즈베키스탄계 미국인 아노라가 러시아 재벌 아들 이반을 만나고, 라스베이거스에서 충동적으로 결혼하는 1막은 전형적인 신데렐라 내러티브(Cinderella narrative)를 따라갑니다. 여기서 신데렐라 내러티브란 하층 계급의 여성이 상층 계급 남성과의 결합을 통해 계급 상승을 이루는 서사 구조를 말합니다. 솔직히 저도 초반부 브루클린 저택과 라스베이거스 장면을 보면서, 비현실적인 설정임을 알면서도 잠깐은 "이번엔 진짜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이반의 부모가 결혼 소식을 듣고 현지 관리인 토로스를 움직이는 순간부터, 영화의 장르 자체가 바뀝니다. 이때 등장하는 개념이 바로 계급 재생산(class reproduction)입니다. 계급 재생산이란 기존의 계급 구조가 결혼·교육·문화 자본을 통해 다음 세대에도 그대로 유지되는 메커니즘을 뜻합니다. 이반의 부모가 혼인 무효를 지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이나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계급 경계를 침범한 결혼이기 때문입니다.
영화가 특히 날카로운 지점은, 이 구조를 추상적 메시지가 아니라 토로스·이고르·가닉이라는 '하수인 3인방'의 몸을 빌려 보여준다는 데 있습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데, 이들과 애니가 바냐를 찾아다니는 2막은 이상하게도 제일 재밌으면서 제일 쓰라린 파트였습니다. 셋 다 거칠고 위험한 남자들인데, 동시에 명령을 내리는 쪽과는 완전히 다른 위치에 있는 노동자들입니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아비투스(habitus) 개념으로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아비투스란 개인이 속한 계급의 사고방식·행동 양식·취향이 몸에 배어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성향 체계를 의미합니다. 이반은 아무리 애니를 사랑한다고 해도, 부모의 전화 한 통에 그녀를 두고 도망칩니다. 그의 몸에 배어 있는 계급적 아비투스가 감정보다 먼저 작동한 겁니다.
이 영화가 신데렐라 서사를 해체하는 방식의 핵심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로맨틱 코미디처럼 시작해 관객의 기대를 의도적으로 이용한 뒤 뒤집는다
- 계급 장벽은 사랑으로 허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구체적인 인물들의 행동으로 입증한다
- 하수인들조차 계급 구조 안에서 자유롭지 못한 노동자임을 2막에서 병렬로 보여준다
- 이반의 이탈은 미성숙의 문제가 아니라 계급 재생산 메커니즘의 작동이다
결말 해석: 애니의 눈물이 담고 있는 것
혼인 무효가 확정되고 애니가 다시 낡은 방으로 돌아온 뒤 이고르와 보내는 마지막 장면은, 제 경험상 이 영화에서 가장 해석의 여지가 많은 지점이었습니다. 이고르는 이반이 줬던 다이아 반지를 돌려주고, 자신의 이름 뜻(전사)을 설명한 뒤 휴대폰으로 "Anora"의 의미를 찾아 '석류, 빛, 밝음'이라고 읽어줍니다. 그리고 "난 애니보다 아노라가 좋다"고 말합니다.
이 장면이 강렬한 이유는, 영화 내내 아무도 진지하게 묻지 않았던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에 누군가가 처음으로 답해주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개념이 상품화된 정체성(commodified identity)입니다. 상품화된 정체성이란 경제적 거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이름·몸·감정이 상품으로 취급될 때 형성되는 자아 인식을 뜻합니다. 애니는 일터에서 자신을 "애니"라 부르며 상품화된 자아로 살아왔습니다. 이고르가 "아노라"라는 본명의 의미를 찾아 읽어주는 행위는, 그 상품화된 정체성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그녀를 처음으로 불러주는 선언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따뜻함과 동시에 꽤 복잡한 감정이 올라왔습니다. 애니가 그 호의에 "몸으로 갚으려" 하다가, 이것이 단순 거래로 처리되지 않는 순간 무너져 울어버린다는 해석에 저도 동의하는 편입니다. 평생 몸을 거래 수단으로 써온 사람이, 처음으로 대가 없는 시선을 받는 순간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비판적으로 보면, 이 엔딩은 의도와 별개로 상당히 모호한 여지를 남깁니다. 감독의 의도는 계급 구조의 바닥에서 서로를 붙잡고 버티는 두 사람의 씁쓸한 연대, 즉 계급적 연대(class solidarity)를 보여주는 것으로 읽힙니다. 계급적 연대란 같은 계층의 사람들이 구조적 압박 속에서 서로를 인정하고 지지하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화면만 놓고 보면, 또 한 번 남성의 욕망을 위해 여성의 몸이 소모되는 장면으로 읽힐 여지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애니의 눈물에 대한 해석도 연민·자기 각성·체념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어서 강렬하긴 하지만, 동시에 영화가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에게 선택지보다는 '반응'만 허락하는 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영화 비평 매체 로저 이버트닷컴은 션 베이커 감독이 이 결말에 대해 "관객이 각자 에필로그를 쓰길 바랐다"고 밝혔다고 전합니다(출처: RogerEbert.com). 또한 제77회 칸 영화제 공식 심사위원회는 이 작품을 황금종려상 수상작으로 선정하며 "계급과 젠더의 교차점을 다루는 탁월한 시선"을 수상 이유로 들었습니다(출처: Festival de Cannes).
이 불편함을 일부러 남긴 영화라면 대단한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꽤 결정적인 한계입니다. 저는 아직 그 경계에서 판단을 완전히 내리지 못했습니다.
「아노라」는 보고 나서 곱씹을수록 더 많은 층위가 드러나는 영화입니다. 신데렐라 동화의 문법을 따라가며 관객을 들뜨게 만든 뒤, 그 환상이 얼마나 계급 현실을 지워버리는 방식으로 작동했는지를 잔인할 정도로 보여줍니다. 보시기 전에 장르와 수상 이력보다, 이 영화가 마지막에 무엇을 묻고 있는지 먼저 알고 들어가시길 권합니다. 그 질문을 끌어안고 나오는 경험이, 이 영화의 진짜 본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 아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