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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레노라, 종교적 트라우마, 구조적 폭력)

by 영화는 영화다 2026. 4. 24.

영화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영화를 보다가 "이 사람은 왜 저럴까"가 아니라 "이 사람이 저럴 수밖에 없는 구조가 뭘까"로 질문이 바뀌는 순간이 있습니다. 저는 그 순간이 레노라가 혼자 숲으로 걸어 들어갈 때였습니다. 이 영화가 그냥 폭력 스릴러가 아니라는 걸, 그 장면 하나로 확신했습니다.

팩트: 이 영화가 만들어진 방식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The Devil All the Time)는 2020년 공개된 작품으로, 안토니오 캠포스 감독이 도널드 레이 폴락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연출했습니다. 러닝타임은 약 138분이고, 톰 홀랜드, 빌 스카스가드, 로버트 패틴슨, 세바스찬 스탠 등이 출연합니다. 2차 대전 직후부터 베트남 전쟁 시기까지, 미국 오하이오와 웨스트버지니아의 빈곤한 농촌 지역을 배경으로 여러 인물들의 서사가 교차하는 구조입니다.

이 영화에서 핵심적으로 작동하는 개념은 종교적 트라우마(religious trauma)입니다. 종교적 트라우마란 신앙 공동체 안에서 발생한 심리적 상처로, 특히 죄책감과 수치심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에게 내면화될 때 발생합니다. 영화 속 아빈의 아버지 윌러드가 전쟁에서 돌아온 후 나뭇가지 십자가 앞에서 무너지는 과정, 광신 전도사 로이가 아내를 제물로 바치는 과정, 그리고 프레스턴 목사가 신도들을 착취하는 과정이 모두 이 개념의 변주처럼 보입니다.

영화가 그리는 폭력의 양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윌러드 러셀: 전쟁 후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신앙으로 덮으려다 광기로 진입
  • 로이: 선택받았다는 믿음이 타인의 생명을 제물로 삼는 극단으로 이어짐
  • 프레스턴 목사: 권위와 언어를 이용해 약한 신도를 성적으로 착취하는 위계적 폭력
  • 칼 & 샌디: 욕망과 충동을 '예술'이라는 명목으로 포장한 연쇄 범죄
  • 보데커 보안관: 제도적 권력을 이용한 부패와 은폐

PTSD란 외상 사건 이후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심리적 반응으로, 플래시백·회피·과각성 등의 증상을 포함합니다. 영화에서 윌러드는 이 증상을 정상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종교적 강박으로 치환하는데, 저는 이 부분이 단순한 캐릭터 설정이 아니라 당시 전쟁 귀환 군인들이 실제로 겪었던 구조적 방치를 반영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실제로 미국 재향군인부(VA) 자료에 따르면, 2차 대전 참전 군인의 정신 건강 문제는 수십 년간 제대로 된 진단 체계 없이 방치되었습니다(출처: 미국 재향군인부).

의견: 레노라의 죽음이 가장 문제적인 이유

저는 이 영화에서 가장 문제적이라고 느낀 지점을 하나만 꼽으라면, 레노라의 서사를 다루는 방식을 선택하겠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영화가 비판하려는 구조적 폭력을, 레노라를 서사의 도구로 쓰는 과정에서 스스로 반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레노라는 어머니를 광신 전도사에게 잃고, 프레스턴 목사에게 성적으로 착취당해 임신하고, 결국 혼자 숲으로 들어가 죽습니다. 마지막 순간 살고 싶다는 마음이 스쳐 지나가지만 이미 늦어버리는, 그 장면은 분명히 충격적이고 슬픕니다. 그런데 저는 그 장면이 끝나고 나서도 계속 불편했습니다. 레노라의 죽음이 그녀 자신의 이야기로 마무리되는 게 아니라, 아빈의 분노를 촉발하는 기폭제로 바로 전환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서사 구조를 '여성 희생 서사(Women in Refrigerators)' 트로프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Women in Refrigerators란 여성 캐릭터가 주체적인 서사 없이 남성 주인공의 동기를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소비되는 창작 관행을 비판하는 개념입니다. 1990년대 미국 만화 비평에서 출발했지만, 영화를 포함한 대부분의 대중 서사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레노라가 겪는 일은 너무 많고 너무 잔인한데, 정작 그녀가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영화가 깊게 파고들지 않습니다. 프레스턴 목사의 카리스마는 공들여 보여주면서도, 레노라가 그를 신뢰하게 된 내면의 과정은 거의 생략됩니다.

제가 직접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오래 멈췄던 장면이 바로 그 지점이었습니다. 프레스턴 목사가 설교하는 모습은 길고 인상적으로 담겼는데, 레노라의 감정선은 거의 요약본처럼 처리됩니다. 관객은 레노라가 왜 목사에게 마음을 열었는지 충분히 이해하기 전에, 이미 그녀가 임신했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미디어 내 젠더 재현을 연구하는 Geena Davis Institute on Gender in Media에 따르면, 주요 서사에서 여성 캐릭터가 자신만의 목표와 서사를 가지는 비율은 남성 캐릭터에 비해 여전히 현저히 낮습니다(출처: Geena Davis Institute on Gender in Media).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연출과 연기 면에서 분명히 수준 높은 작품이지만, 이 지표에서 예외가 되지는 못합니다.

프레스턴 목사의 위선적 카리스마를 다루는 로버트 패틴슨의 연기는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보기 전까지는 이 캐릭터가 이 정도의 설득력을 가질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더 아쉬웠습니다. 같은 공력을 레노라에게 들였다면 이 영화는 단순히 '인상적인' 작품이 아니라 진짜 중요한 작품이 됐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아빈이 프레스턴을 향해 총을 드는 장면은, 감정적으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구조적으로는 또 다른 '남성 주인공이 여성을 대신해 심판을 집행하는' 서사로 읽힙니다. 레노라는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완성하지 못하고, 그녀의 자리를 아빈의 서사가 채웁니다. 이게 제 경험상 이 영화의 가장 근본적인 불균형입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생각이 오래 이어지는 작품인 건 분명합니다. 다만 그 생각이 레노라를 향하기보다는 아빈을 향하게 설계되어 있다는 점이, 이 영화를 볼 때 한 번쯤 의식하고 봐야 할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폭력과 위선을 정면으로 다루는 드문 영화지만, 그 비판의 시선이 완전히 균형 잡혀 있지는 않습니다. 강렬한 경험을 원한다면 충분히 볼 만한 작품이지만, 레노라와 샬롯 같은 인물들이 어떻게 소비되는지를 의식하며 보시면 영화가 훨씬 입체적으로 읽힐 겁니다. 보고 나서 불편한 감정이 남는다면, 그건 영화가 의도한 것이기도 하고 의도하지 못한 것이기도 합니다.


참고: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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