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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퀴어 (인물 관계, 짝사랑, 루카 구아다니노)

by 영화는 영화다 2026. 4. 27.

영화 퀴어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신작 〈퀴어〉는 2024년 베니스 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공식 초청된 작품입니다. 처음엔 단순한 퀴어 로맨스물이겠거니 했는데, 극장을 나오고 나서 한참 동안 말이 안 나왔습니다. "사랑받고 싶었던 게 아니라, 사랑하는 척이라도 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리와 유진, 이 관계를 연애라고 부를 수 있을까

혹시 누군가를 좋아하면서도 "이게 사랑인지, 아니면 그냥 집착인지" 구분이 안 됐던 적 있으신가요? 〈퀴어〉는 그 경계선에서 시작해 끝까지 그 경계를 허물지 않는 영화입니다.

중년 작가 윌리엄 리(대니얼 크레이그)는 1950년대 멕시코시티에서 술과 마약으로 하루하루를 흐릿하게 보내는 인물입니다. 미국에서 도망쳐 온 이방인이고, 이미 많은 것이 무너진 상태입니다. 그러다 길에서 우연히 스친 청년 유진 앨러튼(드류 스타키)을 보고 처음으로 무언가에 강하게 끌립니다. 제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느낀 건, 리의 이 끌림이 단순한 성적 욕망이라기보다 오랫동안 결핍됐던 감정적 연결에 대한 갈망에 가깝다는 점이었습니다.

문제는 유진입니다. 그는 리의 호감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명확히 받아주지도, 단호하게 거절하지도 않습니다. 이 영화에서 핵심적으로 작동하는 감정 구조가 바로 이 지점인데, 영화 평론 용어로는 이를 서사적 긴장의 비대칭성(narrative asymmetry)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비대칭성이란, 두 인물이 같은 상황에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감정적 무게를 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리에게 이 관계는 마지막 불꽃 같은 사랑이지만, 유진에게는 심심풀이에 가까운 호기심입니다.

제가 이 관계에서 가장 불편하게 느낀 장면은 유진이 리와 함께 밥을 먹고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다른 사람들 틈으로 섞여 들어가 리를 소외시키는 부분입니다. 유진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입니다. 리만 뻣뻣하게 남겨져 있습니다. 저도 비슷한 상황을 겪어본 적 있어서인지, 그 장면에서 괜히 가슴이 서늘해졌습니다.

이 두 인물의 관계에서 주목해야 할 핵심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리는 유진에게 사랑, 집착, 의존, 구원 욕구를 동시에 투사하는 인물입니다.
  • 유진은 호기심과 약간의 호감으로 관계를 유지하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한 발 뒤로 물러섭니다.
  • 나이, 경제력, 정서 안정 면에서 리가 훨씬 취약한 위치에 있고, 유진은 그 관계를 조절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 유진은 후반부에 "나는 퀴어가 아니다,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것뿐"이라는 말로 스스로를 리의 환상 바깥에 위치시킵니다.

이 불균형이 영화 전체의 긴장감을 만들어 냅니다. 겉으로는 둘이 함께 여행을 다니고 술을 마시는 친한 사이처럼 보이지만, 감정의 무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다른 곳에 있습니다.

루카 구아다니노의 연출, 아름답지만 그게 문제이기도 합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으로 이미 퀴어 감수성을 증명한 루카 구아다니노가 이번에는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었을지, 솔직히 기대가 컸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기대한 것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강렬했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연출 기법은 미장센(mise-en-scène)과 환각의 결합입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조명, 배우의 위치, 색감, 공간 구성 등을 의미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리의 정신 상태가 불안정해질수록 화면 자체가 현실과 환각 사이를 넘나드는데, 관객이 "지금 이 장면이 실제로 일어난 건지, 리의 머릿속인지"를 계속 의심하게 만드는 구조입니다. 야헤(Yage)라는 환각 물질이 등장하는 여행 시퀀스에서 이 연출이 극대화됩니다.

제가 영화를 보면서 솔직히 이 부분에서 피로감을 느낀 것도 사실입니다. 리의 시점에 갇혀서 따라가다 보면, 유진이 실제로 어떤 인물인지보다 "리에게 유진이 무엇이었는가"가 더 중요해지는 순간이 옵니다. 그 관점은 영화를 더 잔인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유진이라는 인물을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닌 리의 집착을 위한 서사 장치로 소비해 버리는 느낌도 줬습니다.

대니얼 크레이그의 연기는 제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007 시리즈로 굳어진 이미지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그는 구부정한 어깨와 술기운에 붉어진 눈, 웃어 넘기려다 실패하는 표정으로 리를 완전히 다른 인물로 만들어 냈습니다. 반면 드류 스타키의 유진은 끝까지 속을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라 영화가 끝나고도 "저 인물은 정말 아무 감정이 없었던 걸까"라는 의문이 따라다녔습니다.

이 영화에서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건 자전적 서사(autobiographical narrative)의 무게입니다. 자전적 서사란 작가나 감독이 실제 자신의 경험이나 내면을 픽션 형식으로 풀어낸 이야기 구조를 말합니다. 원작은 윌리엄 S. 버로스가 1985년에 출간한 동명의 자전 소설로, 그가 실제로 경험한 짝사랑과 집착을 바탕으로 씌여졌습니다(출처: 시네21). 영화가 단순히 픽션이 아니라 한 인간이 실제로 겪었던 일방적 사랑의 기록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리의 행동들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베니스 국제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 인터뷰에서 이 작품이 "라벨이나 정체성보다 관계의 감정 그 자체에 집중한 영화"라고 밝혔습니다(출처: 베니스 국제영화제). 제가 보기엔 그 말이 절반쯤은 맞고, 절반쯤은 감독 자신의 변명처럼 들리기도 했습니다. 감정에 집중한다면서도, 유진이라는 인물의 감정은 끝까지 화면 안에서 자리를 잡지 못했으니까요.

〈퀴어〉를 보고 하루 이틀이 지난 뒤에 오히려 더 많이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나도 언젠가 집착에 가까운 감정을 사랑이라고 우겼던 적이 있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드는 영화였습니다. 좋은 장면과 문제의식은 분명히 있는데, 인물의 자리는 충분히 채워지지 않은 느낌. 그래서 저에게 이 영화는 보는 동안보다 보고 난 뒤가 더 긴 영화로 남을 것 같습니다. 퀴어 영화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한 번쯤 보시되, 답을 기대하기보다 물음표를 안고 들어가시는 것을 권해 드립니다.


참고: 퀴어 (영화), 나무위키 / 시네21 / 루카 구아다니노 인터뷰, 베니스 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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