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영화136 존 오브 인터레스트 (악의 평범성, 미장센, 엔딩 해석) 영화관을 나오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극장 계단을 내려오는데,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이 학살도 아니고 시체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꽃이 피어 있는 정원이었습니다. 어딘가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그 풍경이, 가장 오래 남았습니다. 그 순간 이 영화가 뭔가를 제대로 해냈다는 걸 직감했습니다.담장 옆 '완벽한 집'이라는 배경1943년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는 담장 바로 옆 대저택에서 아내 헤트비히, 다섯 아이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강에서 수영하고, 말을 타고, 정원에서 꽃을 가꾸는 일상입니다. 제가 처음 이 설정을 접했을 때, 솔직히 좀 믿기지 않았습니다. 이게 실화라는 게요.영화는 이 일상을 고정 카메라로 집요하게 따라갑니다. 연출 언어로 말하자면 이른바 관.. 2026. 5. 12. 클로즈 유어 아이즈 (관람 후기, 결말 해석, 추천 여부) 솔직히 저는 빅토르 에리세 감독을 이 영화 보기 전까지 잘 몰랐습니다. 31년 만의 신작이라는 문구만 보고 극장에 들어갔는데, 나오면서 한동안 자리를 못 떴습니다. 영화가 끝난 게 맞는지 확인하려고 크레딧을 끝까지 앉아서 봤을 정도였습니다.관람 후기: 3시간이 짧게 느껴진 이유솔직히 초반 30분은 좀 헤맸습니다. 흑백 화면으로 시작하는 오프닝이 본편인지 극 중 영화인지 바로 구분이 안 됐거든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바로 이 영화의 핵심 장치였습니다.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영상은 극 중 미완성 작품인 「작별의 눈빛」이고, 그 안에서 유대인 귀족이 사립탐정에게 잃어버린 딸을 찾아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메타픽션(Metafiction)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메타픽션이란 허구 안에 또 다른 허.. 2026. 5. 11. 조디악 (실화 기반, 집착, 미제 사건) 157분짜리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멈추고 싶은 충동이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조디악은 반대였습니다. 멈추고 싶은데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2007년 데이비드 핀처 감독이 연출한 이 실화 기반 범죄 스릴러는, 자극적인 살인 묘사보다 사건을 좇는 사람들의 무너짐을 훨씬 더 집요하게 보여줍니다. 처음엔 단순한 연쇄살인 영화인 줄 알았는데, 보고 나니 이건 집착에 관한 영화였습니다.실화를 얼마나 충실하게 재현했는가영화는 1968년 캘리포니아에서 시작된 실제 조디악 킬러 사건을 기반으로 합니다. 조디악 킬러는 피해자를 살해한 뒤 스스로 작성한 암호문 편지를 샌프란시스코의 신문사 세 곳에 동시에 보낸 것으로 유명합니다. 여기서 암호문이란 단순한 숫자나 문자 나열이 아니라, 특수 기호와 알파벳을 혼합한 치환 .. 2026. 5. 10. 인사이드 르윈 (순환 구조, 반복 서사, 예술과 생계)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화면이 꺼진 뒤에도 르윈 데이비스가 어두운 골목에서 쓰러지는 장면이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그게 처음 장면과 똑같다는 걸 알아챘을 때, 뭔가 심장 한쪽을 눌러버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코엔 형제가 2013년에 내놓은 이 영화는 제66회 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았지만, 화려한 수상 이력보다 훨씬 조용하고 지독한 방식으로 관객을 붙잡습니다.원형 서사 구조가 만드는 지독한 현실감제가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가장 낯설었던 건 플롯의 부재에 가까운 구성이었습니다. 주인공이 성장하고, 관계가 변하고, 마지막에 무언가를 얻거나 잃는 기존의 극적 구조가 여기서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대신 영화는 원형 서사 구조(circular narrative)를 택합니다. 원형.. 2026. 5. 9. 트리 오브 라이프 (비선형 서사, 자연의 길, 은총의 길)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데도 영화관에서 중간에 퇴장하는 관객이 속출했다는 영화가 있습니다. 테렌스 맬릭의 트리 오브 라이프입니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난해하길래"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는데, 직접 보고 나서는 그 퇴장의 의미를 이해했습니다. 동시에, 끝까지 앉아 있길 정말 잘했다는 확신도 들었습니다.비선형 서사가 주는 낯섦과 그 이유일반적으로 영화는 인과관계가 분명한 선형 서사 구조를 따릅니다. 선형 서사란 사건이 시간 순서대로 흐르며 원인과 결과가 논리적으로 연결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트리 오브 라이프는 이 공식을 처음부터 거부합니다.우주의 탄생 장면이 수십 분간 펼쳐지고, 공룡이 등장하고, 갑자기 1950년대 텍사스의 어느 가정으로 뚝 잘립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솔직히 당.. 2026. 5. 7. 보이후드 (관찰자, 성장 서사, 올리비아)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165분짜리 성장 영화"라는 말에 적잖이 겁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보고 나니 지루하다는 생각보다 "내 옛날 앨범 어딘가 있는 것 같다"는 이상한 기시감이 남았습니다. 드라마틱한 반전도, 숨막히는 클라이맥스도 없는 영화가 왜 이렇게 긴 여운을 남기는지, 그리고 어떻게 봐야 더 깊이 볼 수 있는지를 경험 기반으로 풀어보겠습니다.12년 촬영이라는 형식, 그게 정말 효과적이었나보이후드의 핵심 제작 방식은 롱기튜디널 촬영(longitudinal filming)입니다. 여기서 롱기튜디널 촬영이란 동일한 피사체나 인물을 장기간에 걸쳐 반복 촬영하며 시간의 변화를 기록하는 방식으로, 다큐멘터리 분야에서 주로 쓰이던 개념입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이것을 극영화에 .. 2026. 5. 5. 이전 1 ··· 16 17 18 19 20 21 22 23 다음